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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족의 뿌리에 관한 또 다른 추정

ㅁı녀오r ○ㅑ수 2016. 5. 19. 06:35

靺鞨族으로 불려진 種族 또는 集團을 두고, 韓國, 中國 및
日本의 史學者간의 입장은 매우 차이가 많고, 自國의 위치를
위에 두고 해석하려는 경향이 짙다.
특히, 高句麗나 渤海가 언급될 때 더욱 심해진다.

現代에서 古代의 歷史를 해석함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점은
史書나 史料가 빈곤하고, 그 동안 浮沈하여온 여러 民族이나
集團이 고유의 言語를 고유의 글자로 기록해 두지 못했기 때문이며,
그나마 빈곤한 사료나 사서는 漢字로 기록된
中國의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말갈족은 퉁구스족의 일족으로 시베리아, 만주,
함경도지방에 살았으며, 역대로 숙신, 읍루, 물길이라 불려졌고,
고구려 건국후 고구려에 복속했다가, 고구려 멸망후 발해에 예속,
일부는 신라로 예속, 발해 가 거란에 멸망한 후, 거란에 복속하였다가
여진족으로 만주지역에 남아 현대의 만주족을 이루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백제 온조왕때 하남위례성이 말갈족의 침입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말갈족의 주요 활동무대를 생각할 때,
두 가지의 의문이 생긴다. 첫째는, 고구려 세력권 남쪽, 백제의 북쪽에
고구려에 복속하지 않은 강력한 세력의 말갈족의 집단이 있어서,
그 침입으로 하남위례성에서 남한산성을 쌓고 이전까지 해야 했는가이고,

둘째는, 온조왕때의 하남위례성과 남한산성이 지금의 한강 유역에
위치했었는가이다. 온조백제의 위치와 비류백제의 위치 및
그 흥망성쇠에 관하여 지금도 여러 가지 假說이 제기되고 있는데,
나는 이 두 의문점중에서 온조왕때 한강변의 하남위례성이
강력한 말갈집단의 수차에 걸친 침략을 받았다는 전제하에 추론해 보고자 한다.

**백제가 지금의 한강 이남지역(온조백제-하남위례성,비류백제-미추홀(인천?))

에서 발흥하였다는 기존의 학설은 많은 도전을 받고있다.

삼국사기에 나타난 천문기상현상은 중국, 일본보다 더 정확하다는 게

최근의 연구 결과이다.

그런데 백제의 별자리 관찰위치를 연구한 한 학자의 말에 의하면

백제가 한강 남쪽에 위치했다는 기존의 학설이 매우 이상하다고 한다.

즉 백제는 지금의 요동, 요서지역에 있어야 맞다고 한다.

그런데 백제를 요동지역에 두게되면 나머지 기록의 신빙성이 떨어진다.

어찌된 일일까?

백제라는 나라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백제는 여러 해상집단들이

건국한 나라이다.

백제는 한강유역에도 요동, 요서에도 지금의 산동성과 북경근처에도

있었던 것이다.

내 말이 이상하다고? 그럼 삼국지 위지 동이전을 보라!

중국사람이 쓴 역사서에 백제가 산동, 북경에도 있었다고 쓰고있다.

우리와 중국의 주류사학계에서는 무시하지만..

 


우선, 말갈(靺鞨)의 명칭을 보면 중국측에서 漢子化하기는 하였지만
史書기록시 말갈족 자신들이 자신들을 일컸던 명칭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다면, 말갈의 원래의 발음은 이와 유사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런데, 고구려, 발해 시대에 그 구성원중의 하나인
말갈족언어의 관리를 위해 별도의 조직을 운용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어, 발해어가 통용되었거나,
의사소통에 큰 어려움이 없는 정도의 유사성을 가졌었다고
추정할 수 도 있겠다.

그래서, 우리 고대어와 연결지어 보니 '말'+'갈', '말'+'겨레'등이 떠오른다.
'말'은 크다는 뜻이고 '갈'은 작다는 뜻이다. 또한, '갈'은 '갈래',
'겨레'등과 동원류로 볼 수도 있겠다.
일일 사극에 자주 등장하는 "대소 신료들 ......" 와 연결지어 보면,
'말갈'은 '크고 작은(많은 부족,마을)'을 칭하는 말에서 왔다고
추정할 수도 있겠다. 말갈족이 큰 구심점없이 소부족 단위로
여러나라에 服屬해온 점을 감안할 때 일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갈'을 '갈래', '겨레'와 동윈으로 보면, '큰 갈래', '큰 겨레'로 해석되어
'큰 의미에서의 같은 族屬'을 호칭하는 것이라고 추정할 수가 있겠다.

이렇게 보면, 온조왕때 하남위례성을 침입한 말갈은 고구려 북쪽
또는 함경도지방에서 남하한 것이 아니라, 온조백제 주변에 토착하고 있던
다소 독립적인 부족이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또한, 거주지역이 같다는 이유로 말갈을 숙신, 읍루, 물길과 같은 원류의
민족 또는 집단으로 취급하는 것도 상당한 무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말갈족이 거주하여온 지역은 기원전 수세기전부터
중국의 정치상황, 만주지역, 한반도의 정치상황에 따라
많은 집단들이 이주해 오고 나가는 연출을 계속해 왔기 때문에
활동성이 미미한 土着部族集團을 제외하고는 같은 집단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고구려, 발해는 말갈족을 軍事集團으로 활용해 왔기 때문에
활동이 미미한 토착집단과 동일시 하기 어렵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나는 말갈족을 古朝鮮, 夫餘시대부터 있어온 우리민족의
한 갈래라고 생각하며, 그 동안 高句麗, 渤海시대에
다소 異質的으로 취급되었던 것은 그들이 支配階層을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女眞族, 滿洲族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생각된다. 

여진족,만주족 설화에서 금나라 시조 아골타는
신라왕족의 후예라고 주장하였고, 신라의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의
후손이라는 주장도 최근 설득력있게 대두되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原流가 新羅등 한민족과 동일하다고 믿어 왔으나,
우리민족의 主流勢力에 儒敎的 價値가 도입되면서 또한, 고려왕조의
신라청산 및 융화정책때문에 의도적으로 배제했던 것같이 생각된다.

우리가 지금까지 믿어온 "마의태자는 금강산에 은둔하며,
최후를 마쳤다."는 내용도 많은 사가에 의해 재검토되고 있으며,
또 반드시 재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夫安金씨가 마의태자의 자손임을 주장하는 점도
심도깊게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에 있어서의 여진족, 만주족과 우리의 언어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라는 의문을 제기될 수도 있겠다.
한 뿌리라고 해도 한동안 독립적으로 살다 보면,
언어의 분리가 의외로 빨리 일어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1950년이후 남북한의 言語분화도 불과 50여년의 세월을 감안할 때
상당히 진전되었고, 고대에는 현대에 비해 통신이나 교류의 수준이
매우 낮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해 가능하리라 생각된다.